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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說] 사랑의 正體
朴京範, 2008-10-28 오전 01:33:02  
 

사랑의 正體


캠퍼스에는 조금 따가운 초여름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오후에 어렵사리 도서관에 자리를 잡은 나는 중앙을 통하는 넓은 계단을 내려왔다.

저 아래쪽의 식당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시간은 내게 가장 즐거운 시간이다.

사람들을 만나, 미리부터 알던 친구들은 더욱 깊이 있는 이야기를 하고, 그 동안 얼굴만 알고 있었던 사람들은 어색하게나마 서로 말을 트는 계기를 만들어 새로운 친구가 된다.

이제 졸업학년이 된 내게는 또한 하급생들과의 만남도 많았다. 내가 상급생으로서의 어려움이 없어서인지 고교동창이거나 학과선후배의 관계가 되지 않는 하급생들도 내게 형이라 하며 같이 친구처럼 가까이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남들은 대학 일이 학년이 지나면 좋은 시절이 다 갔다고들 하는데 나는 오히려 학년이 거듭 올라갈수록 대학생활의 재미를 더 느끼게 되는 것 같았다. 사귀는 친구의 폭도 넓어지고 이 한정된 기간의 의미를 최대한 살리기 위해서 매일같이 노력할 줄도 알게 되었다.

이 시절을 가장 보람있게 보내는 방법의 하나는 (내가 훗날 보다 확실히 깨달았지만) 인류역사를 통해 쌓여온 진리를 자기의 앞길을 밝히는 빛으로 하기 위해 젊음을 바쳐 파고드는 것이겠지만, 그 외에도 나는 하루하루의 대학생활에서 무언가 서로 더 배우는 것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캠퍼스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촉각을 세웠다. 마음 맞는 여러 친구들과의 다양한 만남은 캠퍼스를 떠나고 난 후에는 얻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여 그 기회를 최대한 살리고자 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본래 의미의 진리탐구를 게을리 하거나 하는 학생은 아니었다. 나는 나름대로 노력을 다하기도 했다. 내가 충분히 진리탐구에 몰두하지 못했던 것은 나의 태만 탓이 아니라 생각되었다. 사람의 탐구의 방향은 무한히 다양한데 얼마 안 되는 가짓수의 분류로 규격화된 지식모델을 요구하는 현실에, 내가 무난히 따르기는 어려웠다. 나는 어느덧 내 나름만의 학문의 체계를 쌓고 있었다고나 할까. 기존의 학제의 잣대로는 측정이 불가능한.

여하튼 학년이 올라가면서 나는 더 폭넓고 다양한 교우관계를 즐기고 있었다. 대학은 인생의 축소판이다. 일 학년 시절은 유년기와 같아 멋모르고 그냥 흘러 지나가고 말았다. 이 학년 시절은 청년기와 같아 뭘 좀 알 것 같은 마음에 이것저것 의욕만 앞서 좌충우돌 하지만 제대로 되어나가는 것은 없었다. 삼학년 시절은 장년기와 같아 이제 주변사회의 돌아가는 원리를 좀 알게 되어 앞에 나서 모든 일을 이끌 자신도 있게 되는 시기였다. 그 역량을 발휘할 기회는 충분히 있지 못했지만 어쨌든 그런 대로 보람있게 보냈는지 모르겠다. 이제 내가 맞이하는 사학년은 마치 노년기와 같아 알 것은 다 충분히 알고 모든 일에 현명히 대처할 지혜도 쌓았으나 이미 더 남은 기회가 거의 없는 것이 아닌가. 인생으로서는 청년기의 초반에 불과하지만 앞으로의 인생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살아보지 않고도 짐작되는 바 있었다. 대학생활을 통한 한 번의 집약된 시행착오를 거친 연후에, 다가오는 인생의 큰 마당에서는 인생의 고비마다 그에 앞서 현명히 대처할 지혜를 쌓아 훗날 후회를 적게 하는 것이 대학생활의 의미를 더욱 살리는 것 중의 하나가 아닌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나는 계단을 내려왔다.

아무리 그래도 진리탐구, 아니 쉽게 말해 책 공부는 더 해야겠는데... 그런데 공부하는 도서관은 위에 있고 노는 식당은 아래에 있는 탓에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기가 당연히 훨씬 쉬우니 모처럼 도서관에 자리를 잡고 있다가도 조금 피곤하기만 하면 금방 아래로 내려가 좀 쉬고싶은 유혹이 생겨나는 것이었다. 게다가 식당에서 시간을 보내다 공부를 좀 하자고 도서관으로 돌아가려면 내려올 때보다는 훨씬 길어 보이는 계단을 밥 먹어 노곤한 몸으로 딛고 올라가야 하니 누가 옆에서 내쫓지 않는 바에야 조금이라도 더 있어보려고만 하는 것이었다. 식당에서는 웬 말 친구가 그리 많은지, 필요한 말 불필요한 말 의미 있는 말 의미 없는 말을 서로들 다 나누어 퍼내고는 주위가 어둑하기 시작할 무렵에야 제각기 자리를 털고 일어나 저 위 고지로 향한다. 그러나 한심한 것은 이제 자리를 잡고 자기의 신분으로서 사회적으로 가장 요구되는 본분을 행하고자 하는 내게 졸음은 걷잡을 수 없이 찾아오는 것이다. 잠이 깨었을 때 주위는 한산하고 벽의 시계는 이미 열 시를 넘기고 있다. 더 있을 시간도 없다. 나는 자리를 챙겨 일어난다. 그리고는 줄줄이 늘어선 캠퍼스의 가로등불 밑을 지나 심야 하교한다. 스스로도 한심하다. 남들이 보면 분명 밤늦게까지 공부하다 나오는 학생이라고 생각하겠지. 이럴 줄 알았으면 밥을 좀 적게 먹는 건데... 어머니는 웬 밥을 그렇게 많이 싸 주시고 나는 또 미련하게 그 밥을 물까지 더해가며 다 먹고 말았나.

계단 하나 내려오면서 무슨 그리 많은 생각을 하나. 아니 내게 있어서 도서관과 식당을 잇는 계단은 이다지도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 김에 털어놓는 것이다. 사실 이 계단의 놓인 형태가 지금과 달랐다면 그에 따라 일생이 바뀌었을 사람이 한 둘이 아닐 것이다.

계단의 중간 평평한 곳에서 나는 한 지기(知己)와 마주쳤다.

아는 사람이 뭐 한둘이라고 마주침 그 자체를 큰 의미 삼을 일은 없지만, 마주친 이는 그래도 이즈음 내게 적지 않게 만남이란 것의 의미를 생각해보게 하는 이였다. 말이 늦었다. 그는 남자가 아닌 여자다.

나는 대학 초년생때의 미팅에서 별 재미를 갖지 못했다. 도대체 애프터가 뭐지? 내가 연락처 물으면 안 알려 주던데... 다음에 만날 약속을 해? 안 올지도 모르는데 그걸 어떻게 믿고 며칠을 기다려? 그 뒤로 나는 학생시절 줄곧 여자를 사귀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내게 당면한 생활 그 자체를 헤쳐 나가는 것부터가 계속적으로 나의 급박한 일과였다. 아슬아슬 줄타기하며 한 학기 한 학기 넘기는 학점에 때로는 좌절하면서도 애써 다른 의미를 찾고 다시 일어서기도 했고... 이번 학기부터는 정말 마음 잡고 공부 좀 하겠다며 정말로 열심히 시작을 하려 하는데 나라 전체 학교 전체가 시끌시끌 하는 통에 이내 휩쓸리다가, 굳게 마음먹어 그런 분위기와 절연하고 정말로 열심히 공부하겠다 마음먹은 그 다음날은 또 휴교... 그 날을 잊지 못한다. 휴교라는 말에 학교의 써클 룸에 놓아두었던 가방을 가져와야 해서, 그래도 학교 안에 들어가 가져올 수는 있겠지 하고 갔더니만, 교문 앞에서부터 삼엄하게 지키고 있는 계엄군은 아예 가까이 얼씬할 엄두도 못 내게 했다. 그 때 멀리서 보이는 학교의 건물은 유리창에 석양이 비쳐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 때 나의 우울한 마음에 따라 학교 건물도 흐느끼고 있는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나의 학업에의 정진을 방해하며 계속해서 일어나는 이런저런 주변의 일에 이를 갈고는, 「이제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눈 깜짝 않고 정말 공부하겠다.」 생각하니까, 나의 외압에 대한 면역성이 커갈수록 그 자극은 그만큼 더 커져 또다시 나를 편안히 있지 못하게 했다. 최근에 일어난 죽음에 의한 시위요구는 나로 하여금 또다시 그들을 따라나서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행동도 행동이려니와 민감한 내 마음속은 그에 대한 생각으로 들어차 책이 눈에 들어오지가 않았다. 정말 끈질기기도 하다. 우리 시절 학생들은 웬만치 의지 굳지 않으면 자기 길은 가지 말고 모조리 시국운동이나 하라는 건가.

나는 부담스러웠던 여자친구 사귀기보다는 고교 졸업 때까지 누리지 못했던 폭넓은 교제의 기회를 이용해, 생각을 자유로이 통할 수 있는 남자 친구들을 많이 사귀는 것에 더 흥미를 두었다. 평준화 고교에서, 그것도 의도적으로 학생들을 골고루 뒤섞은 반에서 내게 친구가 될 만한 급우는 별로 없었다. 그런데 대학에 오니 주변 모두가 고교때 그렇게 희귀했던 류의 그런 친구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고교 때 이질적인 급우들과의 사교관계에 대처 능력이 없던 나로서는 이들 대학친구들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들과의 교우의 즐거움에만 빠지던 나는 간혹 친구에로의 기대가 지나쳐 필요 이상으로 마음을 쓰는 경우도 있었다. 이성에게로의 접근에 자신감을 가지지 못했던 것에 연유해, 자신의 마음의 안정을 찾으려는 대상 찾기와 일상생활에서의 부담 없는 친교의 대상을 혼동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친구는 소유하는 것이 아닌데... 방향을 갖지 못하는 이러한 교제방식은 자연히 그러잖아도 중심 없는 대학생활에 방황의 도를 더할 수밖에 없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것이 대학생활의 마지막 해가 되어서 나는 여학생들과의 언로가 트인 것이다. 여학생들과도 어느 정도씩 친밀한 대화의 기회를 가지게 되어가면서 나는 이전보다는 풍요롭고 정상적인 교제생활을 누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마음의 안정을 찾을 대상을 여자 중에서 찾기 위해 그 적극적인 사업을 개시했다는 것은 아니었다. 여하튼 인간 본연의 응당 있어야할 성질의 교류를 가지게 되어 비로소 어느 정도 정서생활의 조화로움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요즈음 이제까지는 모르던, 여자와의 대화라는 것에 참 매력을 느낀다. 사람들과 대화할 때는 만나는 이의 성향에 따라 자기가 변하는 것을 느낀다. 그런데 여자와의 만남의 자리는 정말로 확연히 구별되는 별개의 나 자신을 느끼게 했다. 여자와의 대화는 앞서 대학 초년 시절의 미팅에서 있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 때는 그저 피상적인 자기 주변의 얘기일 뿐이었다. 최근의 만남에서 가지는 것은 친한 친구에게 이야기하듯 자기의 깊은 생각을 진지하게 털어놓는 것, 말 그대로 여자친구와의 대화이다. 거기서 나는 나의 마음이 무척이나 감상적으로 비약할 자유가 주어짐을 느꼈다. 같은 남자와의 대화는 무언가 구체적인 논리가 있지 않으면 싱겁고 헛시간을 보낸 것같이 느껴지기 일쑤다. 그러나 여자와의 대화는 그러한 보이는 알맹이에 아쉬울 필요가 없이, 얼마든지 감성의 나래를 펼 수가 있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마주친 여자는 바로 이즈음 나에게 가장 많은 대화 시간과 영향을 주었던 한해 후배 정임이었다.

그녀와는 이전부터 서로 얼굴은 알아왔지만 같이 대화한지는 이제 두 달 남짓쯤 되었다. 그러니까 아직 잔디밭의 새싹이 연녹색을 띠고서 작년의 누런 마른 잔디와 뒤섞인 채로 자라고 있을 때였다. 내가 하급생인 광수와 함께 하교하려 하는데 그는 도서관 자리에 앉아 있던 정임을 불러내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미 커플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영근이라는 남자친구와 가까이 지내는 사이였다. 영근도 물론 요전에 나와 말이 트여서 잘 알고 지내는 사이다. 아직 정임은 그저 서로 안면이 있고 인사교환을 하는 정도였다.

셋은 같이 하교하여 인근의 음악다방에 들어갔다.

다방에서는 이즈음 유행하는 팝송인 「베티데이비스 아이즈」가 흘러나오고, 이어서 국내가요인 「목로주점」이 흘러나왔다. 꽤 크게 흘러나오는 음악 때문에 우리는 서로 얼굴을 가까이 대면서 가볍게 소리를 질러가며 대화할 수밖에 없었다.

광수는 오늘 나를 일부러 정임과 대화하게 하려 한 것 같았다. 그는 이전에 영근이 동료학생들 사이에 인기있는 정임을 자꾸만 자기가 독점하려 하는 것을 정임 그녀 본인과 더불어 조금은 못마땅한 눈으로 보고 있었던 한 사람이었다. 오늘 나와 그녀가 이전보다 서로 잘 알게 되면 그녀의 생활의 폭은 더 넓어질 것이다.

다방에서 정임과 대화를 나눴다. 광수는 자기의 이야기 보다는 둘의 대화의 분위기를 더 맞춰주려는 것 같았다.

대화의 주제는 남녀의 차이점이었다. 이즈음 나는 벌레에도 암수가 있고 짐승에도 암수가 있듯이 사람도 두 가지가 있다는 사실에 새삼스러이 눈뜨면서 그에 대한 경이감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여자라는 것에 대한 경외스러움과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대화 중에 나온 그녀의 말은 단순했다.

『나는 여자로서 난 것이 오히려 다행으로 생각해요. 우선 군대 삼 년 이득 볼 수 있잖아요?』

『그런 것 말고도 나는 본질적으로 여자에 대해 부러운 것이 있어.』

나는 긴 얘기를 그녀에게 했다. 요란한 음악 속에서 그녀는 얼굴을 내게 근접시키고 경청했다.

『지난번 겨울 방학이 끝날 때 즈음이었던가. 나는 친구 몇 명과 함께 1박2일의 야유회를 갔어. 우리 일행 중에는 우리 모두와 잘 아는 여학생과 그녀의 동생이 함께 있었어.

우리는 그 날 저녁 숙소에서 짐을 풀고 즐거운 분위기 속에 가벼운 농담을 하면서 저녁채비를 했어.

한참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익어갈 무렵이었지. 갑자기 대화상대의 중심이 되었던 여자가 크게 울음을 터뜨렸어. 우리 모두는 어안이 벙벙해 말을 못하고 있었지. 이 와중에서 그녀는 울먹이며 계속 말을 해대는 거야.

「정수야 너는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장난 삼아 농담을 했지만 나에게는 자존심에 비수를 꽂는 상처를 주는 이야기였어. 너는 저주를 받을 거야.」

나도 그 때 오가던 이야기를 옆에서 들었지만 그게 그럴 정도의 이야기인지는 도저히 이해가지를 않았어. 그 여자의 독무대는 한참 동안 계속되었지. 방안이 어두워지고 촛불도 켜졌어. 기타를 잘치는 딴 애가 그 여자의 계속되는 독백에 맞춰 기타를 쳤어. 시간이 흐르면서 다른 친구들도 하나 둘 이야기를 했어. 그 때 나도 한 말이 있었지.

「나도 남들은 이해 못하지만 이러한 마음을 느낀 적은 있었어. 그러나 감히 이러한 행위를 한다는 것은 관습상으로도 용납 못되는 것이고 설사 용납된다 해도 그렇게 터져 나오지를 않았어.」

나는 밖으로 나왔어. 그 여자의 표적이 되었던 친구도 미리 밖에 나와 있었어.

황당해하는 그에게 나는 「여자는 원래 사고의 차원이 전혀 다른데 무심코 남자들끼리의 사고방식으로 대한 것이 문제였던 것 같다.」고 했지.

우리는 별구경을 조금 한 후 안으로 들어왔지.

한참이 지나고 모두들 술도 마시며 저마다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는데 상황이 종료되니 그 여자는 다시 웃는 낯으로 말하기를 「아까 기타로 독백의 반주를 쳐 준 분위기는 매우 좋았어.」했고 옆에서 누구는 「명철이의 기타 솜씨가 일품이었지.」했지. 그러더니 걔는 「누가 녹음 좀 하질 그랬니?」 하고 아쉬워하기까지 하더라.

이 때 나는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있었어. 여자는 자신에게 닥쳐온 감성의 밀물을 그때 그때 소화해 낼 수 있기에 어느 면에서는 더욱 이 세상을 무리 없이 살 수 있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하는 것 같아. 그런데 많은 남자들은 자신이 느낀 그때 그때의 감정과 한이 제 때에 분출되지 못하고 가슴속에 응어리져 쌓일 수밖에 없기도 하지. 그래서 여자가 더 오래 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녀는 조금 공감한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계속되는 큰 음악소리 때문에 나는 테이블 위로 어깨를 수그리며 귀를 기울이고 간간이 그녀의 입김을 쐬어가며 대화를 계속했다.

한참을 더 대화하고 난 뒤에야 나는 함께 다방 밖으로 나와서 그녀와 헤어졌다. 그 때 찻길을 건너 헤어지면서 오늘 비로소 새로이 알게 된 한 사람에 대해 호감 어린 듯한 눈길과 미소를 보내던 그녀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그 뒤로도 나는 가끔 교내에서 그녀와 마주칠 때마다 단편적이나마 서로의 생각을 나누며 나름의 친목을 가꾸어 왔다. 

가벼운 인사를 하고 내려가려는데...

『좀 얘기하지요.』

그녀가 불러 세웠다.

그녀는 오늘따라 검은 정장 투피스에 흰색 브라우스를 받쳐입은 단아한 모습으로 있었다. 초여름의 환한 햇빛아래 그녀의 모습은 오늘따라 눈부셨다. 갸름한 얼굴에 두드러지지 않는 이목구비의 그녀의 얼굴이 오늘은 무척이나 선명히 시야에 들어왔다.

그러나 내가 그녀에게서의 받는 느낌은 어디까지나 어깨 위에서 만이었다. 그녀의 인상을 대하는 것이 내 마음에 적잖이 상쾌함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럴 때에도 내 심장의 박동 수는 조금의 변화도 없이 정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정임이든 아니든 간에 여학생이 얘기하자는 것이 문제될 일은 아니지만 일단 의외였다. 그녀가 새삼스레 나와 무슨 할 얘기가 있을 것이라고 이렇게 단 둘이 만났을 때 얘기하자는 걸까.

나는 정임과 함께 계단 중턱의 벤치에 앉았다. 많은 학생들이 앉아있는 우리의 앞을 저마다의 용무 때문에 바삐 오가고 있었다. 이렇게 세련된 차림의 여학생과 벤치에 나란히 앉아 팔목을 무릎에 걸치고 마주보며 사뭇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친구에게 혹은 그저 좀 안면이 있는 다른 누구에게라도 눈에 띈다면 나로서는 과히 기분 나쁜 일이 아니다.

『요즘 성에 대한 부담이 내게 닥쳐와 마음이 흔들려요.』

평소에 그녀와 같이 이야기할 때에 주로 하던 낱말이 아니다. 이제까지 나와 그녀와는 대개 학교 주변얘기나 시국얘기를 주로 하지 않았던가.

『무슨 말인데?』

나는 처음에는 알아듣지 못했다. 말을 할 때 일일이 「性」이라고 명시할 수는 없을 것이니.

『영근이 말예요.』

『그런데...』

『친구로서는 좋은데.』

『...』

『남자로서 그 애를 생각하면 싫어져요.』

이어서 그녀에게서 나오는 얘기도 나는 처음에는 무슨 소린가 했다. 그러나 이내 그 말뜻이 무엇인지는 알 수 있었다. 야릇한 긴장감이 내게 일어났다.

그러나 만사를 올바르게 긍정적으로 유도해 주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나는 곧 그녀에게 그것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고 말해 주었다. 

『그야 처음 동급생으로 만나 사귀는 사이다 보니까 한꺼번에 훗날의 모든 것을 다 생각해 보기는 힘들겠지.』

『사람들은 내가 어려서 그렇게 생각한다고 그러는데 그것만이 이유인 것 같지는 않아요.』

정임은 계속 진지한 표정으로 얘기했다.

정임이 내게 이렇게 자기 마음의 갈등까지 털어놓는다는 사실은 적잖이 고맙기도 하고 또 약간의 의무감까지도 느끼게 했다.

『글쎄 어쨌든 현재는 친구로서 편한 사이로 지내는 것에 만족하는데 너무 훗날의 일을 생각하니까 그러겠지. 다음에 한번 부담 없이 얘기해 보자.』

나는 곧 강의 시간이 있어서 그녀와 헤어졌다.

그날 저녁 정임과 영근을 식당에서 보았다. 그네들의 급우들도 함께 있었다. 나는 그들과 자리를 같이했다.

약간의 잡담이 끝나고 일동은 도서관으로 올라가려고 일어섰다. 이 때 정임은 영근에게 말했다.

『나 이 형하고 좀 얘기하다 올라갈께.』

『그래 좀 얘기하다 금방 와.』

영근을 비롯한 정임의 남자 급우들이 모두 갔다. 정임과 나는 둘이 남아 저녁날 캠퍼스의 한적한 벤치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늘 낮에 하다 못한 얘기를 하자는 데에 그녀와 나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정임이의 그런 생각은 아마도 우리가 자랄 때의 교육이 너무 성에 대한 가치부여를 안 했기 때문일 거야. 우리 시대의 교육은 생명창조의 신성한 행위를 너무 저급한 것으로만 여기게 만들었지. 우리가 고등학교 때 배운 알퐁스도데의 「별」 에서도 몸을 전혀 대지 않는 것이 순결한 사랑이라고만 생각하기 쉽게 되어 있지 않아?』

『어머, 맞아요. 형. 그런 거 같아요.』

정임은 내가 하는 얘기의 거의 전부 고개를 끄덕이고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녀는 내 말이 사리에 맞아서 동조해 주는 것이라기보다는 서로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을 마냥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모처럼의 기회를 맞아 나도 안에 있는 많은 얘깃거리를 그녀에게 나오는 대로 풀었다. 대화 그 자체만으로도 여자와의 행복을 충분히 느끼고 만족하던 시절... 그 시절은 훗날 스스로 다시 생각해도 정말 더없이 순결했던 시절이었다.

『형과 나는 비슷한 게 많은 것 같아. 추구하는 바가.』

『정임이가 추구하는 바가 뭔데?』

『난 훗날 영향력있는 자리에 오르고 싶어요. 권력이 있는 자리에 있고 싶고. 그렇다고 해서 흔히들 생각하는 것 같은 그런 욕심이 아니라.』

『자기의 뜻을 펼칠 영향력을 키우고 싶다는 것이겠지.』

날이 어두워지면서 하나 둘 주위의 가로등이 켜졌다. 바람도 어느 덧 서늘해졌다. 우리 둘은 모처럼 맞이한 자기들끼리의 대화에 시간가는 줄을 몰랐다.

『인제 올라갈 때가 되지 않았을까? 영근이가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그래요. 그런데 오늘은 더 공부하거나 할 마음이 안 나네요. 그냥 가려는데 형은 어떠세요?』

『나도 오늘은 오래 있지 않으려고 그래.』

『그럼 우리 올라가서 정리하고 도서관 문 앞에서 만나서 같이 가죠.』

『그래 그러자.』

나도 오늘 그녀와 함께 하교하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이 기뻤다.

나는 가방을 챙겨 다시 나왔다. 정임은 조금 먼저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와 같이 어둑해진 캠퍼스의 길을 걸었다.

그런데, 같은 사람들끼리의 대화라도 그 분위기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인가 보다. 주위는 아직 방금 전과 같은 초저녁이지만, 서서 걸어가는 지금은 앉아서 대화할 때와는 전혀 다른 말이 나오고 있었다. 차분하고 긴 내용은 나오지 않았고 짤막짤막 단편적인 얘기만이 내게로부터 나왔다. 내 언변이 꼭 짧은 이야기라 해서 효력을 내지 못하는 것은 아닌데 지금 이 여자 앞에서는 그런 말이 잘 나오지를 않는 것이다. 그냥 단순한 문답 밖에는...

훗날 내가 맞선에서 다시금 빈번이 겪을 일이기도 했지만 애인 관계가 아닌 남녀가 같이 걸어가는 것처럼 어색한 것이 없다. 자연스레 손이라도 잡을 수 있다면 훨씬 걷기가 자연스러울 텐데... 차라리 마주보고 앉아 있을 때라면 몰라도 별다른 제스처없이 그저 나란히 같이 걸어가는 건 시종 어색한 느낌을 가지게 했다.

나는 같이 교문을 나와 일단 정임이 사는 하숙집 부근까지 동행하고 버스를 타기로 했다.

그런데 오늘 정임을 만나면서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바로 어젯밤의 꿈이었던 것이다.

꿈은 긴 내용은 없었다. 배경은 어슴푸레 어둠이 깔리고 주위 한적한 길에는 허옇고 낮은 건물인듯 하는 것들이 있었다. 거기서 나는 정임과 같이 있었다.

둘이는 어느 정도 같이 걷다 한 자리에 선 것 같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는 정임을 껴안았다. 그녀도 얼른 내 품안에 끼어 들었다. 그리고는 나와 그녀가 거의 동시에 말하면서 낮은 하늘에 울려 퍼지는 것 같은 소리가 있었다.

「우리가 서로 이렇게 좋아하면서 왜 말을 못해야 하냔 말야.」

나는 마음속으로 이 이야기를 그녀에게 할까 말까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는 중에도 둘 사이는 그저 단편적인 말들이 오가면서 걸음이 계속 옮겨지고 있었다. 우리 둘이 가는 길은 아직 택지개발이 안된 좁은 길로서 주위에는 낮은 비닐하우스만이 있고 사방은 툭 트여져 있었다.

이 때 나는 어렴풋이 이 곳이 꿈에서 본 그 곳과 같음을 깨달았다. 꿈에 본 주변의 낮은 건물인 듯한 것들은 바로 이들 허연 비닐하우스들이었던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가지면서도 나는 미처 말로 털어놓지는 못했다.

결국 그녀와 갈라서 가야할 곳에까지 이르렀다. 나는 아무래도 꿈에 그녀를 보았다는 말을 해야겠다 싶었다.

『꿈에 정임이를 만났어.』

나의 말에 정임은 놀라는 눈치였다.

『그럼 뭘 했나요? 얘기하고 있었나요?』

그녀로서는 자기를 꿈에 보았다는 것이 상당히 큰 의미로 받아들여 질 수 있었다. 더군다나 꿈에 무엇을 했느냐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엉겹결에 대답했다.

『아니... 그냥.』

결국 더 이상의 말은 나오지 못했다. 내가 더 말을 못하니, 아마 정임은 꿈속에서 어떤 형이하학적인 무엇이 있었기에 그랬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그대로 그녀와 갈림길을 돌아서고 말았다.

그날의 일은 이렇듯 별다른 계기를 만들지 못하고 넘어갔다. 그렇다고 해서 정임의 생각으로 인해 내게 깊고 애틋한 회한이 젖어드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런대로 담담하게 그날을 넘어갔고 그 다음날 그리고 그 다음날 여전히 정임을 만나고 또 서로 편하게 같이 대화하며 지냈다.

여름방학은 나에게는 학교를 쉬는 시간이 아니었다. 나는 학교에 적을 두고 있을 때에는 학생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에 시간을 투자해야한다는 생각에 따라 빠짐없이 학교에 나왔다. 그러고는 예의 그 절정에 오른 폭넓은 교우관계를 뜨거운 태양아래 즐겼다.

정임과 영근도 학교에 나왔다.

『우리 수영장 같이 가요.』

나와 마주친 정임과 영근이 말했다.

「자기네들끼리 오붓하게 갈 것이지 왜 그러지?」

나는 생각했지만 얘네들의 권유는 순수했다. 나도 따라 저기 뒷산 높은 곳에 있는 수영장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나는 수영을 할 줄 모르기 때문에 그냥 몇 번 들어갔다 나오고는 서있기만 했다.

정임은 수영을 꽤 잘 하는 것 같았다. 한 오미터 이상 떨어진 거리에서 영근을 향해 헤엄쳐 가서 서로 손을 잡곤 하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손을 잡는 영근이 내겐 그렇게 부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내게는 아직도 여자의 손을 잡는 것이란 매우 먼 거리에 있는 것으로 보여 그런 것에 대한 아쉬움마저도 별반 느끼지 않았다.

아무튼 마지막 여름방학은 나의 학교생활 중 가장 재미있었던 기간이었던 것 같았다.

여름이 지나고 캠퍼스는 가을 학기가 되었다. 나는 생각했다.

「나머지 남은 한 학기를 어떻게 보낼까. 입학 후 사 년 동안 사물의 이치를 깨닫는 사고력은 정말 내가 생각해도 크게 발전했다. 그러나 가끔가다 그것을 표현할 언어능력은 입학 후 보다 늘지 않았다는 것이 느껴진다.」

나는 한번 문학강의를 듣고 싶어졌다. 한국현대시인에 관한 강좌를 마지막 학기에 신청했다.

첫 날 웅성거리는 강의실에서 들리는 한 목소리가 있었다.

『너희들 내년에는 뭣 하려고 이걸 듣니?』

3학년 강의인 이것을 들으려고 2학년 후배들이 많은 것을 보고 한 3학년 여학생이 하는 말이었다.

『내년에는 휴학하죠 뭘.』

한 2학년 학생은 웃으면서 말했다.

이 때 차분한 낮은 톤의 그녀의 목소리가 내게 와 닿았다. 그녀를 주목하자 곧 그 목소리와 같이 온화한 그녀의 첫 인상에 나는 사로잡히고 말았다.

남들이 말로만 하던 첫눈에 반한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임을 알았다. 이제야 그 참 의미를 몸소 체험하는 것이었다.

사람은 성장기를 통해 자신의 마음속에 나름대로의 이성(異性)의 모습을 만들어나간다. 그리하여 그의 성장과 함께 그의 이상(理想)의 이성도 성장하여 나아간다. 그가 비로소 이성을 받아들일 만치 자신의 모습을 갖추어 성장했을 때에, 그가 만난 현실의 어떤 이성의 모습이 그의 공상의 이성의 모습과 합치하였을 때, 그 상대방의 인상(印象)은 처음 그대로 끌어들여져 그의 마음속 빈자리를 메우려 하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내게서 있어 소설에 나오는 것과 같은 사랑을 겪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학년 때 교양과목을 공부할 때 외국어 교재에서 한 여자를 마음속에 짝사랑하는 이의 마음을 그린 이야기를 접한 적이 있었다.

주인공은 새 교각 건설의 공을 선전하려는 당국에 의해 고용되어 하루하루 다리를 건너는 사람들의 수효를 세어 보고하는 일을 맡는다. 그는 종일토록 다리 입구 초소에 앉아 당국의 지시대로 오가는 모든 사람들의 수효를 센다.

그러나 무미건조하고 따분하기만 할 그의 일과에도 작지 않은 낙이 있었다. 그는 매일 두 번 어김없이 다리를 오가는 한 소녀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녀가 나타나면 그의 가슴은 울렁거리고 심장은 고동은 빨라진다. 그녀가 다리를 건너는 동안 그러한 상태가 계속된다. 그녀가 다리를 건너 사라질 때까지 그의 숫자 헤아리기 작업은 중단된다. 그리하여 그녀는 그가 헤아린 다리건너는 사람들의 수에서 제외된다. 그녀만은 당국의 선전목적에 이용되는 이 숫자에 포함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 글을 배울 즈음에 나는 바로 이 이야기의 느낌을 겪는 일이 있었다. 모임을 통해 알게 된 친구 진영을 만날 때마다 나는 가슴이 철렁 하고 울렁거리며 긴장했다. 그리고는 서클모임에도 순전히 그와 만나기 위한 목적으로 나갔으며 모임에 그가 없으면 맥이 빠져 의미를 갖지 못했다. 그리고 특별한 용건이 없이도 자주 그와 만나고 싶어했다. 진영도 애초에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서로 가까워졌었다. 그러나 내가 친구 이상의 것을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을 알고는 어색하고 불편해졌다.

『넌 내게 친구 이상의 것을 요구하는 것 같다.』

그의 말이었다.

나는 이 갈등을 당시에 나와 가까웠던 모임의 선배에게도 상의한 바 있었다.

「인간관계를 여자관계로 생각하지 말라.」는 선배의 말이었다.

자신의 바램대로 되어가지 않는 것에 마음의 불안정이 컸다. 그렇다고 진영이 내 바램대로 다 해준다는 것을 기대할 수 없음은 나도 판단할 수 있었다. 해답은 없다. 나는 동성애자도 아니다. 단지 나의 나이에 맞는 정서생활을 같이 형성할 대상이 필요한데 그 대상을 찾지 못하는 데서 생긴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대상이 꼭 이성이어야 한다는 것에 나는 자연스레 동의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한 친구를 만났을 때 느끼는 자신의 상태가 소설에서의 사랑느낌의 표현과 얄밉게도 똑같은 것을 발견했을 땐 무척 당혹하고 걱정스러웠다. 이것은 내 스스로의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이런 갈등을 겪던 내게는, 말로만 듣던 사랑의 감정을 여자에게서 처음 느끼게 된 것에 대한 감동은 컸다.

이윽고 들어온 교수는 강좌신청명단을 훑어보고는 말했다.

『이건 전공학술 분야인데 왜 이리 잡다한 학과들이 많아? 문학은 교양하고는 다른 것이단 말야.』

그러고는 출석을 부르다가 다른 비전공 출신 학생 하나에게 물었다.

『자네는 무엇하러 이 강의를 듣지?』

『시인이 되고 싶어서요.』

좌중은 웃음이 터졌다. 나도 「이렇게 쉽게 생각할 것은 아닐 것인데」 하고 생각했다.

부르는 출석이름을 통해 내가 사랑을 느낀 여자의 이름은 영희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업의 진행방식은 내가 예상하던 바와는 전혀 달랐다. 교수가 체계적 지식을 강의하며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그냥 근대 한국의 각 시인들 중 관심 있는 이를 자기가 골라 그에 대해 조사하고 발표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김소월에 관한 조사를 지원했다. 김소월 하면 근대한국의 대표적 시인이니 그에 대해 조사하겠다는 사람이 좀 많았을 것 같았다. 그런데 나 말고는 나서는 학생이 없었다. 이것은 의외로 느껴졌다. 이 시대의 학생들에게는 일견 나약해 보이는 그가 매력이 없었던 것인가. 적어도 약간의 민족주의 운동가적 면모는 보이는 시인이 더 매력이 있었을 것 같았다. 그녀 영희는 만해 한용운을 조사하겠다고 했다. 사실 적어도 그와 같은 시인이 이 시절의 학생들에게 매력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날로부터 나는 영희라는 여학생을 만나는 데에 의미를 두고 강의를 계속 착실히 수강했다.

어느 날  시간을 마치고 오는 길에 정임과 영근을 식당에서 만났다. 가을을 맞이한 주변의 분위기에 걸맞게 대화가 진행되었다.

요즘의 안부를 묻는 정임의 질문에 나는 약간 수줍은 듯이 조심스레 말했다.

『나는 지금 사-랑-을 하고 있는데...』

『형, 정말이예요? 그게 누군데요?』

『강의를 듣다가 보게 된 여학생이야. 정말 말로만 듣던 첫눈에 반한다는게 무언지 지금 알게 되었어.』

이때 영근이 일어났다.

『나 잠깐 저기 갔다올께.』

영근은 지나가는 딴 친구와 잠시 이야기하러 자리를 비웠다.

정임은 계속 나에게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형, 그거 첫사랑이에요? 이전에는 그런 느낌을 가진 적은 없었어요?”

나는 조금 머뭇거렸다.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이 일반 상식의 관점으로서는 다소 예외적일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좀 다른데... 이런 얘기를 해도 될까?』

『하세요. 뭘요.』

『이전에 남자에게서 그런 느낌을 가진 적은 있었어. 그러나 여자에게서는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이번이 처음이었어.』

정임은 조심스레 말하는 나의 고백을 듣고 잠깐 진지해졌다. 나로부터 그녀에게 이런, 조금은 깊은 마음의 고백은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곧 말을 이었다.

『그러면 한 번 만나자고 해야죠. 용기를 갖고 해 보세요.』

『아냐. 난 그냥 이대로도 좋은데.』

영근이 돌아왔다. 정임은 계속 말했다.

“그러면 형은 짝사랑의 고통을 어떻게 견디려고 해요?”

“짝사랑은 마음 속에 지니고 있으면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지. 우리가 이제껏 들은 많은 이야기들 중에도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마음을 깊이 숨긴 채 고통을 삭이는 주인공의 이야기가 아름답게 묘사된 것을 많이 볼 수 있지 않아? 나는 바로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서 그런 비련의 소설속으로 스스로 젖어들어가 감상하는 입장이 되는 거야. 하지만 짝사랑이 겉으로 드러나면 그것은 오히려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만을 남의 의사를 무시하고 추구하는 것이 되니 두렵지 않을 수가 있겠어?”

정임은 마음속에 무언가 느끼는 듯 잠시 말이 없었다. 그녀는 영근과 가까워지기 이전에 다른 어느 급우로부터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구애를 오래도록 받은 적이 있었다. 이러한 경험이 있는 정임에게 있어서 나의 말은 적잖이 공감을 준 듯 했다.

그녀는 영근을 보고 나지막이 계속 얘기하는 것이었다.

『아름다워 보여.』

『사랑하는 사람은 아름다워.』

“아름다운 이야기만 하잖아?”

 ...

그 뒤로 나는 계속 혼자 간직한 사랑의 마음을 영희를 향해 가지는 것만으로 의미를 두고 지내려 했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수업시간 때마다 자기를 주시하는 나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녀도 나를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나는 몇 번 영희에게 만남을 청하려고도 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높은 담장 위의 것이었다.

수업에서의 교대로 하는 발표에 내가 맡은 차례가 왔다. 그날 영희는 수업에 나오지 않았다. 나는 소월에 대한 자료조사를 발표하고서 나름대로 그 분석결과를 얘기했다.

『소월의 시에 나오는 님은 사랑의 대상으로서의 님이라 하기에는 너무 추상적입니다. 아마도 조국이나 어떤 절대자일 것입니다. 소월은 아직 이성(異性)에의 눈을 뜨기 전에 결혼하였기 때문에 여자와의 설레이는 사랑을 가질 기회는 없었다고 봅니다.』

『그런 유치한 해석이 어디있나?』

담당교수는 성을 냈다.

『제가 보기엔 소월의 님은 아무래도 특정한 사람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

나는 말했다. 담당교수는 더 길게 문제삼지는 않았다.

영희를 알게 된 이후로 정임에게서 느끼는 마음과 영희에게서 느끼는 마음의 차이점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정임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았다. 영희를 알고 나서는 정임에 대한 나의 느낌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 여겨졌다.

정임은 자주 가까이 지내다 보니까 친숙해졌고 그러니까 여느 친구와 다를 바 없이 안 만나면 보고 싶고 만나면 얘기하고 싶은 것이다. 그녀는 여자이니 사회적인 관습에 따라 육체적 욕구도 해결하면서 평생 가까이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리하여 성과 무관하게 여느 친구에게서도 가질 수 있는 우정이라는 것과, 마음의 교류와 관계없이 여느 여자에게서도 가질 수 있는 성욕이라는 것이 서로 더해졌던 것은 아닌가. 먼저는 그것을 몰랐었지만 이제 영희를 보아 첫눈에 그녀에게 사랑을 느낀 뒤에 알았다.

「사랑이라는 것은 다른 여타의 요소로부터 말미암지 않고 그 자체 그대로 인간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생겨나는 그 무엇이 아닐까.」


캠퍼스에는 이제 내가 겪을 마지막 겨울이 다가왔다. 졸업이 가까워지면서 나는 당장의 진로가 시급한 상황이었다.

어느 때 이후로 나는 한 번 영희를 만나 마음을 고백할 노력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 사실상 그녀에로의 사랑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그 여자를 매우 필요로 한다. 하지만 그 여자는 나를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나는 그녀를 매우 원하지만 그녀는 나를 별로 원하지 않는다. 나는 그런데 매일같이 그녀를 생각하며 살고 있다. 내가 앞으로 이 사회에서 사는 삶의 형태는 어떠할 것인가.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살 것인가 아니면 내가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살 것인가?」

나는 앞으로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사는 마음가짐의 첫 실천으로서 그녀를 포기할 것을 결심했다.

훗날 돌이켜 보았을 때 이 때의 생각은, 남녀관계를 사회계약관계와 혼동하는, 너무도 고지식하고 도식적인 생각이었음 깨닫고 한탄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 만큼 그 시절 너무나도 순수했던 마음에 대하여 다시 되짚어 음미해 볼 근거이기도 했다.


이 년후 직장인이 된 나는 어느 날 시내에서 우연히 만난 직장동료인 여자와 그여자의 동행인 여자와 함께 다방에서 자리를 마주하고 있었다. 그네들은 주로 나의 이야기를 듣기만 했지 서로 이야기를 깊이 나누는 상대는 아니었다.

『옛적에 연금술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연구하던 때가 있었지요. 귀중한 금을 다른 물질을 서로 섞어서 만들 수는 없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금을 다른 것을 섞어서 만들 수는 없었어요. 왜냐하면 금은 그 이상 다른 것으로 분해될 수 없고 다른 것으로부터 만들어지지 않는 그 자체로서의 물질 즉 원소(元素)이기 때문이었지요.

사랑도 역시 그 자체가 하나의 원소로서 다른 여타 감정으로부터 합성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어요. 우정(友情)과 성욕(性慾)을 섞어 사랑을 만들려고 하는 것은 은과 구리를 섞어 금을 만들려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었지요.』

그 금이란 원소는 무엇일까? 가장 귀중한 것일까 아니면 가장 원초적인 말초본능에 불과한 것일까? 그에 대한 해답을 아직 찾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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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8 오전 01:3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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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京範 : 저서
장편소설 <천년여황>, <은하천사의7일간사랑>, <잃어버린세대>, <베오울프와 괴물그렌델>.
시집 <채팅실 로미오와 줄리엣>.
짧은 소설집 <나는 이렇게 죽었다>.
장편소설 <마지막 공주> <꽃잎처럼 떨어지다>.
연작수필집 <생애를 넘는 경험에서 지혜를 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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